북한은 돈만 있으면
모든 게 가능
평양미술관에 갔다. 벽에 두서없이 진열된 그림들 위로 한 액자 내의 서도 글씨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그대가 품은 뜻이 높다 면 세월은 청춘을 연장해 주리라”는 글씨다. 의미도 좋았지만, 동무, 동지, 선생 소리에 익숙하다 ‘그대’란 명칭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일반적으로 김일성 주석이나 고위간부 연설 서두엔 ‘친애하는 동지 또는 벗들’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저녁식사 후엔 매일 호텔 바에서 소주와 맥주를 마셨다. 이름이 팥소주, 완두소주 등으로 한국 진로와는 술맛이 좀 달랐다. 맥주는 주로 룡성맥주나 봉학맥주(대동강맥주는 2천년 이후 등장)등이다. 특히 신덕샘물 맛은 일품이었다. 관광 후 저녁때 할 일이라곤 주로 술 마시는 일이다. 안내원은 “캐나다 추운 나라에 살아와 그런지 술을 잘 마신다.”며 웃었다.
나는 당시 북한주민들 사생활은 국가에서 전부 통제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연애나 결혼, 이혼도 남한과 별 큰 차이는 없는 듯 했다.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회이긴 하나 서로 음담패설도 곧잘 했다. 화투가 존재하지 않고 대신 카드(주패놀이)를 즐겼고, 남자들은 너도 나도 담배를 피웠다.
어느 날 오후 일정이 ‘꽃 파는 소녀’ 연극공연이었다. 이때 무심히 “내 집안이 지주였다”고 하니 그날 공연이 취소됐다고 보여주지 않았다. 연극내용이 지주로부터 고생하는 어린 소녀 삶에 관련된 때문 같았다.
한번은 가끔 안내원 대화 중 “내 입엔 말보로 담배가 맞아, 켄트가 좋아”하는 소리가 귀에 거슬려 한마디 했다. “여기에도 질 좋은 성천담배인가 있다던데, 왜 모두 외국담배를 좋아해요? 남쪽에선 외국담배 안 피우고, 한국담배만 핍니다.”하니 조용해졌다.
매일 식당과 호텔 바(Bar)를 이용하니 아가씨들과 격이 없어지고 농담이 늘었다. 그때는 접대원동무라고 불렀다. 수년 뒤엔 가슴명패가 접대원 대신 의례원 또는 봉사원, 판매원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 접대원들 부모직업이 대부분 고위층이다. 인민대의원(국회의원)이나 외교관인 경우가 많았다.
한 아가씨 얘기론 ‘차츰 결혼관이 달라져 혼인 전 성관계를 갖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고 전한다. 그녀는 이를 “천리마가 많다”라고 표현했다.
안내원은 오랫동안 함께 살던 부부의 이혼 경우를 우스갯소리로 들려줬다. 여자가 “내 송편 같은 그것을 절편으로 만들어놓고 이혼하게 됐다”고 말하자, 남자도 “무슨 소리야. 내 송곳 같은 그것도 물망치가 됐는데….”라고 했다는 것이다.
틈이 생길 때마다 안내원과 함께 책방을 찾아다녔다. 어느 호텔서점 2층에서 책을 사면서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서점이 상점을 겸하고 있어 여자들 서너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평양에선 어디 연애할 데가 없나요? 누구 나와 연애 좀 합시다.”라고 하니 “우린 모두 세대주(남편)가 있는 몸이야요. 선생은 아직 결혼 안 했나요?”하고 묻는다. 솔직히 “결혼했지요.”라고 답했다.
한 여자가 “남자는 저렇다니까. 임꺽정 소설에도 나오지요. 여자는 한 갈래, 남자는 여러 갈래라고.”하니, 다른 여자가 옆에서 맞장구친다. “맞아. 아내가 죽으면 남자는 슬픈척해도 변소 간에서 히쭉 웃는다고 하잖아.”
고려호텔로 돌아왔다. 1층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서양풍이었다. “아. 서울다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같네.”하고 말하니, 환전해 주던 아가씨가 힐끗 나를 보며 “정치색 띠고 있구먼.”한다.
예로부터 평양 대동강 숭어국 맛을 못 보면 평양을 다녀갔다는 얘길 말라는 말이 있었다. 그만큼 평양 숭어국이 유명했다. 평양거리에서 숭어국 간판을 발견하고, 하루는 숭어국을 사 먹기 위해 안내원과 함께 그 식당을 찾아갔다.
그러나 문이 닫혀 있고, 다음에 언제 문을 여는지 기약할 수 없어 포기한 적이 있다. 아마 대동강 숭어들이 그간 불경기에 낚시꾼에게 전부 잡혔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김정은 시대에 와서는 평양이 천지개벽됐다고 한다. 도시모습이 무척 많이 변모됐기 때문이다. 평양의 현대식 구조물과 새 레스토랑 등을 보면 과연 이곳이 얼마 전까지 배고픔에 아사자가 속출했던 북한인가 의심케 된다.
평양거리엔 하이힐을 신고, 신형 유모차를 끄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주민들이 휴대폰(북한명칭/손전화)을 사용하고, 인라인 스케이팅 타는 어린이들은 도심 어디서든 발견된다.
누구든 북한에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소리를 이구동성으로 했다. 그만큼 빈부차이 역시 커졌다는 얘기도 들렸다.
1990년대 이전의 김일성시대엔 김 주석이 사망하면 곧 북한이 붕괴된다고 믿는 단순한 풍조가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정일 사후 남북세상은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 속으로 치닫고 있었다.
2012 이민기록문학상 대상 · 2013 대한민국 인권상 표창
『나는 이렇게 아메리칸이 되었다』(다움출판사, 2005)
[느릿느릿 사소한 통일] 이 책은 관훈클럽 기금으로 저술출판 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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