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크로싱NK는 오늘부터 언론인 송광호 님의 방북 회고록 『느릿느릿 사소한 통일 — 외국에서 본 남한·북한』(하움출판사)을 연재합니다.
반세기 가까이 언론인으로 활동해 온 저자는 1980년대 말부터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하며 평양과 금강산, 원산 등지에서 마주한 사람과 풍경을 기록해왔습니다. 외국 국적을 지닌 동포의 눈으로 오래도록 지켜본 북녘의 안과 밖은, 남과 북 그리고 흩어져 사는 우리 동포 사회를 잇는 또 하나의 기록이 됩니다.
1989년 1월,
북한에 첫발
1980년대가 저물어가던 어느 해 나는 겨울관광으로 처음 북한을 만났다. 당시는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이 금강산 개발계획으로 방북했던, 모처럼 남북분위기가 좋았던 시기이다. 토론토의 북한 창구를 통해 9박10일간 평양, 묘향산, 개성, 판문점등을 관광했다. 이때부터 내 얘기를 단편적으로 이어가겠다.
베이징에서 첫 조선민항(현 고려항공)을 탔을 때가 생각난다. 좌석 앞에는 “박띠(좌석벨트)를 매시오”라고 적혀있었고, 기내에서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가 흘러나왔다. 이후 기내 음악은 세월 따라 고향의 봄, 반달, 아리랑 노래로 바뀌고 경음악 등으로 달라져 갔다.
기내에선 일반 항공기처럼 양담배, 양주 등 면세기내 쇼핑도 한다. 일체 금연이다. 방송은 한국어와 영어로 안내한다. 소련 어 대신 영어 방송이었다.
“손님 여러분, 평양공항까지 25분 남았습네다. 지금 비행기는 신의주 상공을 통과하고 있습네다. 밑으로 보이는 강이 압록강입네다.”라는 어나운스먼트가 나왔다. 아래 굽이굽이 압록강 줄기는 조국의 산하를 갈라 펼쳐져 있었다.
강은 우리 겨레의 한을 모르는 듯 고요하나 처연해 보였다. 비행기가 북녘 땅으로 들어서자 완공 안 된 105층 유경호텔이 먼저 드러났다. 공항청사 한복판에는 김일성 초상화가 우뚝했다. 대형 초상화를 보는 순간 북한 땅에 왔음을 실감했다.
가기 힘든 북녘 땅
지난1980년대 캐나다의 북한행은 항공로가 복잡했다. 미국(시카고)을 경유해 일본(도쿄)에서 하루 자고, 중국(베이징)에서 묵었다.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을 찾아 비자를 받고, 항공권구입 뒤 공항으로 바삐 움직여야 했다.
그 후 중국 심양(선양)에도 평양노선이 생겨 방북길이 더 편리해졌지만, 많은 북미교포들이 베이징을 거쳤다. 기왕 중국을 지나니 만리장성, 자금성 등 베이징(북경)유적지 관광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북한방문은 캐나다에서 곧장 중국 ‘직항’노선이 생겨 편해졌다.
한번은 방북 시 처음부터 이상스레 일이 꼬였다. 1990년대 베이징대사관을 찾으니 비자발급이 안 됐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호텔에서 다음 항공편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항공편이 1주일에 2번 운항으로, 수일 간격이니 한번 놓치면 시간과 호텔비용을 낭비한다.
며칠 후 대사관을 다시 찾으니 지난주에 이미 비자가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 대사관 실수였다. 담당자는 “어. 송광호가 홍광호로 잘못 기재돼 있었구먼. 입국사증 수수료 25달러 내시오.”라고 퉁명스레 말했다. 이것이 내게 던진 인사말일 뿐이다.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비자를 거머쥐고 공항으로 나가니 이번엔 항공표(베이징〜평양 간)가 말썽이다. 당시 항공권은 요즘처럼 자동 인쇄되는 구조가 아니었다. 토론토에서 티켓구입 시 쓴 기재내용에 뭔가 틀린 모양이다.
북한 공항관리는 추호도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 비행기 표 누가 적었소?”하고 인상을 썼다. “처음엔 토론토 공항 담당자가 적다가 나중 부분은 제가 적었습니다.”라고 솔직히 답했다.
“항공표를 아무나 함부로 적어도 되는 줄 아시오? 이 표는 유가증권이요. 유가증권! 잘못됐으니 다시 표를 사 갖고 오시오.”라며 단호한 자세다. “뭐가 잘못됐다니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미 구입한 표를 또 사야만 합니까? 잘못 기재된 걸 고치면 안 되겠어요?”하고 변명에 급급했으나 허사였다.
그는 “표는 나중 환불받든지 하고, 다시 사 갖고 오시오. 이 표는 받을 수 없소.”라며 눈 하나 깜빡 안 했다.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이 북한관리는 자신의 알량한 세도를 약자에 군림하려는 듯했다. 오래전 서울 한 구청공무원으로부터 겪은 비슷한 경험이 떠올랐다. 도대체 친절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어찌 이러한 행위가 20여 년 전 한국사회와 그리 유사할까. 북한이 뒤떨어져 있는 점은 유독 물질적 측면만이 아니었다.
새로 편도티켓을 사서 짐을 달아보니 이번엔 무게가 엄청 초과해 있다. 지인이 부탁한 이산가족 보따리 때문이다. 허용무게인 20kg을 넘어 35kg이나 됐다. 초과분 15kg 비용을 내는데 돈 계산법이 재미있다.
북한국적 자에게는 초과 kg당 2원, 중국교포 4원, 북미주 교포 경우는 8원이다. 자본주의국가 국민에겐 추가요금을 더 많이 부과하는 규정이 아예 정해져 있었다. 북한에선 미주에서 방문했다 하면 전부 재력이 있는 줄 아는 모양이다.
지난번 평양에서 B 책임지도원과 대화 중 “다음에 올 때는 한 5천 달러 가져오시오.”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때 순간적으로 발끈했었다. “이봐요. B 선생! 그런 얘기 말아요. 5천 달러가 누구 어린애이름이오? 그리 쉽게 말하게.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정말 돈 벌기가 쉽지 않아요. 여기서야 수령님 덕분에 편히 걱정 없이 살지, 해외교포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겨우 돈 모아 갖고 오는 사람이 대부분일거요.”하고 쏘아 주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번은 그가 평양에 대한 소개를 할 때다. 당시 나는 평양시민들은 모두 북한에서 뽑힌 당원들인 줄로 생각했다. “평양은 전부 국가에서 선택된 당원들만이 거주하는 도시인가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내 얼굴을 쏘아보며 “도대체 기자선생은 어디서 그따위 소리를 들었소?”하며 화를 덜컥 냈다.
나중 알게 됐지만 평양은 당원들만 사는 도시가 아니었다. 방북 횟수를 거듭하며 알게 된 사실이다. 주민들의 정보와 극소수지만 평양출신 탈북자들을 통해 알게 됐다.
북에는 확실한 통계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평양시민은 70% 정도가 당원인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평양에서만 반세기이상 거주했다는 토론토에 사는 80대의 한 탈북자 노인은 “아니오. 평양시민의 50~60% 정도가 당원일 겁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김일성 주석 측근이었다는 이 고위급탈북자에 관련해선 나중 다시 언급하겠다.
2012 이민기록문학상 대상 · 2013 대한민국 인권상 표창
『나는 이렇게 아메리칸이 되었다』(다움출판사, 2005)
[느릿느릿 사소한 통일] 이 책은 관훈클럽 기금으로 저술출판 됐음